[애니멀피플] 서민의 춘추멍멍시대
상대방의 외모를 보고, 학벌과 능력을 평가하고 자산을 따지는 사람과 달리 개는 계산하지 않는다. 내가 무엇을 해서 돈을 버는지, 내 외모가 어떤지, 차가 무엇인지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저 자신을 예뻐해주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해 마음을 연다. 모든 것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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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와도 잘 어울리는, 개는 왜 그럴까
근본적인 이유를 찾기 위해 개들을 면밀히 관찰하던 중 다음 장면을 목격했다. 며칠 전 개들을 데리고 애견 놀이터에 갔는데, 거기엔 뒷다리가 하나 없는 개가 있었다. 나름의 사정이 있어서 절단한 모양이다. 사람은 다리 하나가 없으면 걷지 못하지만, 개는 나머지 세 다리가 있어서 잘 걸을 수 있고, 그 개 역시 그랬다.가슴이 찡했던 건 우리집 개들이 그 개를 대하는 방식이었다. 우리 개들은 그 개와 스스럼없이 잘 어울렸다! 그러니까 다리 하나가 있고 없고는 그들 사이에서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에게 장애가 있다면, ‘장애인’이라는 정체성이 다른 모든 것들을 다 압도해 버리고, 우리는 그를 그저 장애인으로 대한다. 장애인은 늘 슬플 것이라는 편견이 우리 안에 있다 보니, 그가 슬픈 표정을 지으면 ‘장애인이니까 슬퍼하는구나’라고 고개를 끄덕이고, 그가 웃으면 ‘억지로 즐거운 척하는구나’라며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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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는 ‘계산’하지 않는다
비단 장애뿐만이 아니다. 우리는 다른 이를 바라볼 때 여러 가지를 본다. 예컨대 내가 소개팅을 나갔다고 해보자. 상대방은 하위 10% 안에 너끈히 들만한 내 외모에 놀란다. 내가 기생충학이라는, 좀 더러워 보이는 생물체를 연구한다는 것까지 알고 나면, 나랑 더 같이 있고 싶지 않다.
그런데 내가 강남에 건물을 몇 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 사실을 아는 순간, 바쁜 일이 생겼다며 일어나려던 상대방은 다시금 자리에 앉는다. “생각해보니 꼭 지금 갈 필요는 없네요. 하하.”
이 경우 내가 그를 어떻게 생각할까? 아무리 미모가 뛰어나다 해도 정나미가 뚝 떨어지지 않을까? 밖으로 표출하지 않아서 그렇지, 대부분의 사람은 다 여기서 자유롭지 않고, 나 역시 마찬가지다. 인간은 하다못해 친구 하나를 사귀면서도 머릿속으로 계산을 한다. 이 친구가 나에게 득이 될 것인가 아닌가를.
옛날에는, 적어도 어린이들은 이런 계산에서 자유로웠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자신과 잘 맞는지, 사람은 좋은지가 아니라, 임대아파트에 사느냐, 부모님이 뭐 하느냐, 차는 뭐냐, 이런 것들이 친구를 사귈지 말지 결정하는 기준이 된다. 내가 아는 한 학부모는 자기 애가 대학에 갔을 때, “과학고 출신을 주로 사귀어라”는 황당한 지침을 내리기도 했다. 이런 일들을 보고 있노라면 인간에 대한 회의가 들 수밖에 없다.
한번 주인을 정하면 그 개는 견주가 먼저 떠나지 않는 한 평생 그의 곁에 앉아 그만을 바라본다. 꼭 견주가 뭔가를 해줘서가 아니라, 같이 있는 것 자체가 좋은 것이다. 그래서 우리 개들은 내가 외출할 때면 슬픈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내가 귀가하면 그렇게 신이 나서 껑충껑충 뛴다. 만일 내가 일이 잘 안풀려 단칸방으로 이사간다 해도, 개들은 나와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해할 것이다.
어느 분이 블로그에 쓴 글을 봤다. 프랑스의 실업률이 증가해 길가에서 먹고 자는 젊은 노숙자들이 많아지고 있는데, 이곳 노숙자들은 꼭 커다란 개를 한 마리씩 데리고 다닌다는 내용이다. 글쓴이는 처음에 동정심을 유발하려고 그러는 게 아닌가 의심했다. 아무래도 개랑 같이 있으면 얼마라도 주고 싶어지니까 말이다. 하지만 계속 그들을 바라보던 글쓴이는 그게 다가 아님을 알아챈다. 그 둘이서 서로를 깊이 사랑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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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존재 그 자체로 바라봐주는 영혼
모든 것을 다 잃은 견주라 해도, 개는 그 견주와 있는 게 세상에서 제일 좋다. 부실한 식사밖에 얻어먹지 못할지라도 그 개는 안다. 그게 견주가 지금 해줄 수 있는 최선이며, 그것밖에 해주지 못하는 것을 견주 또한 안타까워 한다는 것을. 그래서 개는 예전과 다름없이 견주를 대하고, 견주는 그 개를 통해 삶을 지속할 힘을 얻는다.개를 좋아하고 또 키우는 것은 살면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다. 개의 부드러운 털을 쓰다듬을 수 있어서가 아니라, 나를 존재 그 자체로 바라봐주는 맑은 영혼을 만날 수 있어서다. 내게는 이런 개들이 여섯 마리나 있다. 끝날 듯 끝나지 않는 코로나19가 그저 야속하지만, 그 덕분에 내가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를 알 수 있었으니, 약간의 위로는 된다. 우리 개들아, 늘 고마워. 너에게 미치지 못하겠지만, 나도 많이 사랑할게.
단국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