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부터 전학을 자주 다니다보니 친하다고 할만한 친구들이 없었다. 조금 적응할 거 같으면 금방 다른 곳으로 이사하고 처음부터 다시 친구들을 사귀고 또 다시 이사해서 원점으로 돌아가는 일의 반복이었다. 많이 외로웠던 것 같다. 이전 학년부터 계속 같은 학교를 다니며 이미 서로 많이 친해진 아이들 사이에 홀로 낯선 사람이 되어 존재한다는 것에서 소외감을 많이 느끼기도 했다. 그 소외감이 고통스러워서 어떻게든 친구를 빨리 사귀려고 혼자가 되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쳤던 기억이 있다.
소외의 고통을 일찌감치 알아버렸기 때문인지 중학교에 가서도 고등학교에 가서도 어떻게든 항상 함께 다닐 친구를 만들려고 혼자가 되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썼던 것 같다. 소풍을 갈 때 버스에서 나만 같이 앉을 친구가 없어서 혼자 쓸쓸히 앉아서 가는 악몽을 자주 꾸기도 했다.
그래서였을까? 친구를 사귀는 기준이 그 친구가 정말 좋고 잘 알아가고 싶어서가 아니라 ‘누구든지 나를 받아들여준다면’에 가까웠던 것 같다. 깊은 우정을 쌓아가면서 함께 성장하는 것이 목적이었다기보다 단지 ‘혼자가 되지 않는 것’이 목적이었다. 함께 행복해지는 것보다는 오직 내가 외로움을 피하는 것이 관계의 목적이었다.
친구가 혹시라도 나를 싫어할까봐 늘 전전긍긍하고 맞춰주려고 노력하는 한편 그만큼 바라는 것도 많았다. 정작 상대방은 바란적도 없는데 ‘내가 이 관계를 위해 이렇게 애쓰는데’라며 투자한 만큼의 보상을 원했다.
또 사람들이 나를 더 좋아해주길 바라면서 조금만 나의 높은 기대에 못미치는 행동을 보면 멋대로 ‘거절의 신호’로 받아들이고 상처받는 일을 반복했다. 때로는 아예 거절을 염두에 두고 ‘언제 날 밀쳐낼지 잘 봐야지’라며 거절의 신호를 적극적으로 찾아나섰다. 아주 민감한 거절 포착 레이다를 돌리며 이것도 저것도 다 거절이라고 해석하고다녔다. 아이러니하게도 거절이 두려운 나머지 앞장서서 거절을 수거하고 다닌 셈이 되었다. 나의 성급한 오해와 서운함으로 인해 친구들에게도 상처를 많이 줬던 것 같다.
결과적으로 항상 깊은 관계를 갈구했음에도 정작 상대방에게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함께 성장할 수 있을지, 내가 상대를 위해 어떤 걸 할 수 있을지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오직 ‘나’, 내가 사랑 받는 것, 나의 외로움이 채워지는 것 등 ‘내가’ 가득 채워지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다. 관계는 속한 사람 모두가 행복할 때 건강한 것인데 그 당시 내가 추구하던 관계에는 오직 나만 있었고 상대의 자리는 없었다.
일례로 돌아가면서 자기 소개를 하는 상황에서 내 바로 전 사람의 이름을 제일 잘 기억하지 못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이를 다음 차례 효과(next-in-line effect)라고 하는데, 바로 다음이 내 순서이기 때문에 무슨 얘길 할지 고민하다가 바로 옆 사람 이야기를 다 놓쳐버리는 것이다. 관계에서 자신을 신경쓰는 정도가 심할수록 이런 현상들이 더 다양하고 심하게 나타나고 내가 그랬다.
함께 성장하는 관계 VS. 나의 결핍을 채우기 위한 관계
국제학술지 성격 및 사회심리학지에 실린 한 연구에 의하면 소속욕구, 즉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사랑받고 싶어하는 욕구에 크게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성장지향(growth orientation)으로 상대방에 관심이 가고 상대방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어서, 좋은 관계를 통해 함께 성장하고 싶어서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결핍감소지향(deficit-reduction orientation)으로 무엇보다 나의 외로움과 공허함을 매꾸기 위해, 혼자가 되는 것이 싫어서 관계를 맺는 경우이다. 즉 관계를 시작하는 이유와 목적이 서로 다른 것이다. 나의 경우 후자였다고 할 수 있다.
연구에 의하면 성장지향과 결핍감소지향 모두 사람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싶어하는 욕구와 관련을 보였다. 하지만 차이 또한 많았는데, 성장지향은 자신의 인간관계가 쉽게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과 자신감, 속마음을 잘 오픈하는 경향과 관련이 있었던 반면 결핍감소지향은 이들 특성과 관련이 없었다. 대신 사람들로부터 주목받고 관심받기를 원하는 마음, 남들과 비교하는 것, ‘인기’를 갈망하는 것 등과 관련을 보였다.
또한 성장지향이 높은 사람들은 사회적 불안(사람들 앞에서 긴장하는 등)이 낮았고 외로움 또한 낮았다. 반면 결핍감소지향이 높은 사람들은 사회적 불안과 외로움 모두 높았고 자존감 또한 낮았다.
심한 절실함은 독이 된다
성장지향이 높은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것이나 정서적 교감을 느끼는 것, 서로 의지하고 의지함을 받는 것을 편하게 느꼈다. 하지만 결핍감소지향이 높은 사람들은 사람들과 가까워지고 싶다는 욕구는 있지만 막상 깊은 정서적 교감을 하는 것은 두려워하며 사람들이 자신을 싫어할 것에 대한 걱정도 높았다. 이들은 행복감도 또한 낮았다.
연구자들은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조별과제 전과 후 약 두달에 걸쳐 각 특성의 사람들이 주변 팀원들에게 어떤 평가를 받는지에 대해서도 살펴보았다. 그 결과 성장지향이 높았던 사람들은 두 달 후 ‘이 사람은 과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기회가 된다면 이 사람과 다시 일하고 싶다’같은 평가를 많이 받은 반면 결핍감소지향이 높았던 사람들은 스스로도 팀원들과 일할 때 어색하고 쑥쓰러웠다고 평가했으며 팀원들도 이 사람이 비교적 적극적이지 않았고 다시 일하고 싶은 의향도 낮게 보고한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자들은 결핍감소지향이 높은 사람들은 친밀함을 절실히 원하고 외로움을 두려워하지만, 되려 이 절실함 때문에 사람들에게 잘 보여야 한다며 관계에서 큰 부담을 느끼게 되고 따라서 어색하게 행동하거나 주눅이 들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또한 관계를 통해 외로움도 채워야 하고 인기도 느끼고 싶고 사랑도 듬뿍 받고 싶은 등 받고 싶어하는 것이 많아서 상대방을 부담스럽게 만들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이런 특성들이 이들로 하여금 되려 관계를 잘 해나가지 못하는 방해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흔히 사랑을 받는 것뿐 아니라 줄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이 건강한 관계를 만들 수 있다고들 이야기 한다. 거기에 어느정도 근거가 있다는 것이다. 내가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어느덧 오직 나만을 채우기 위한 블랙홀 같은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만약 그렇다면 나의 결핍을 채우겠다는 욕구를 조금 내려놓는 것은 어떨지 생각해보자.
※참고자료
Lavigne, G. L., Vallerand, R. J., & Crevier-Braud, L. (2011). The fundamental need to belong: On the distinction between growth and deficit-reduction orientations.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Bulletin, 37, 1185–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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