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갈 이유를 찾는 능력
‘나는 왜 사는 걸까?’, ‘나는 내가 왜 사는 건지 모르겠어’ 같은 말을 흔히 들을 수 있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직장과 스펙을 갖췄지만 본인은 여전히 자신이 왜 사는 건지 모르겠다고 한탄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게 있다. 인간은 모든 걸 갖춘 듯 보여도 본인이 다 의미 없다고 느끼면 실제로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처럼 불행할 수 있는 동물인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평생을 바친다.
미국 콜로라도 주립대학의 심리학자 마이클 스티거(Michael Steger)는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은 곧 내가 얼마나 가치 있는 사람인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찾는 것과도 같다고 말한다. 의미감의 핵심은 내 삶이 중요하고 나란 존재가 덧없지 않다는 믿음이다.
실제로 삶에 의미가 존재하는지 아닌지를 떠나, 이렇게 적어도 내 삶에 어떤 의미가 존재한다고 느끼는지의 여부, 즉 삶의 의미감(sense of meaning in life)은 우리의 삶과 건강에 큰 영향을 미친다. 살아 있어도 사는 의미를 느끼지 못하면 우리의 마음은 얼마든지 죽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일례로 나치 유태인 수용소에서의 경험을 담은 책 <죽음의 수용소에서>에서 저자 빅터 프랭클은 “그 지옥에서 살아난 사람들은 결국 그런 상황에서조차 꽃 향기와 파란 하늘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며 아직 살아갈 이유가 존재함을 느낄 수 있었던 사람들이며, 의미를 찾지 못하고 의미의 진공 상태(existential vacuum)에 빠진 사람들은 살아 있는 시체가 되어 얼마 가지 않아 죽고 말았다”고 회상했다.
다수의 연구들에 의해 확인된 바 삶에 어떤 목적과 의미가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훨씬 행복하고 자살률도 낮으며 더 장수하는 편이기도 하다. 이들은 치매에 걸릴 확률도 더 낮다. 특히 힘든 일이 닥쳐올 때 여전히 삶이 의미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문제를 이겨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이며 실제로 어려움을 잘 극복하는 편이다. 트라우마를 겪어도 그 안에서 나름의 의미를 찾아낸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훨씬 높은 회복 탄력성을 보이는 편이다. 의미를 찾는 능력, 즉 어떤 상황에서도 살아갈 이유를 찾아내는 능력은 실제로 살아가느냐 아니면 죽어버리느냐를 결정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의미감은 규칙적인 일상에서 온다
그런데 이 중요하다는 의미감을 어떻게 하면 찾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공허함에 빠져 허우적거리지 않을 수 있을까? 머나먼 곳으로 여행을 떠나거나 힘든 수련을 거쳐야만 찾을 수 있을 것 같지만 의외로 답은 간단하다. 바로 ‘규칙적인 일상’이다.
사람들에게 서로 아무 상관없는 랜덤한 사진이나 단어들의 조합을 보여주거나 또는 어떤 규칙과 패턴이 존재하는 사진이나 단어를 보여준다. 예컨대 봄-여름-가을-겨울순의 계절 변화를 보여주는 사진이나 가족-연인-친구 같이 특정 컨셉을 연상시키는 단어 조합을 보여준다. 그러고 나서 사람들에게 자신의 삶이 의미 있다고 느끼는지, 즉 자신의 삶에 어떤 목적과 큰 방향성이 있다고 느끼는지, 또 삶이 얼마나 허무하지 않고 충만하다고 느끼는지, 자신의 삶이 쓸모없지 않고 중요하다고 느끼는지에 대해 물었다.
이런 게 도대체 삶의 의미와 무슨 관련이 있을까 (연구자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일까) 싶지만 놀랍게도 규칙적이고 연속적인 패턴을 보이는 자극들을 본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자신의 삶이 더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으며 어떤 중요한 목적을 가지고 있고 공허하지 않다고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딱히 중요해 보이지 않는 자극들을 봐도 그것들이 어떤 규칙성을 가지고 있으면 돌연 내 삶에도 어떤 의미가 있을 거라고 느낀다는 말이다.
즉, 나를 둘러싼 삶의 환경이 ‘예측 가능’ 또는 ‘이해 가능’하고, 세상이 무질서하지 않고 나름의 이치에 맞게 흘러가고 있다고 느끼면,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자신의) 삶이 무질서하고 매순간이 예측불가 할 때에 비해 더 확고한 방향성을 띈다는 것이다.
어제까지 동쪽에서 뜨던 해가 오늘부터 갑자기 서쪽에서 뜬다고 해보자. 또는 어제까지 신촌으로 가던 2호선이 오늘부터는 신촌을 가지 않는다고 해보자. 어제까지 빵집이었던 곳이 오늘부터 철물점으로 변하고 어제까지 출판사였던 우리 회사가 오늘부터 게임회사가 된다고 생각해보자. 이렇게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고 무질서하기 짝이 없는 세상에서는 내 삶 또한 아노미일 수밖에 없다. 무엇이 의미 있는 행동이고 의미 없는 행동인지, 어떤 목적이 옳고 그른지, 즉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인지를 판단할 수 없게 된다. 반복되는 일상은 전혀 무의미하지 않으며 일상이야말로 삶의 의미를 쌓아 올리는 토대라는 것이다.
매일을 ‘작은 의식’들로 채워나가기
위는 다소 극단적인 예이지만,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반복되던 일상이 파괴된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단순히 불편함을 느끼는 것 이상으로 삶의 의미감이나 방향성을 상실한 듯한 느낌을 받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다.
하다 못해 매일 치르던 작은 의식들, 예컨대 세수하고 이를 닦는 사람들이 있고 이를 먼저 닦고 세수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에게 순서를 거꾸로 바꿔보라고 하면 대다수가 ‘뭔가 잘못되었다. 불편하다’는 반응을 보이는 것이 우리 인간이다.
다행스러운 사실은 인간은 적응하는 동물이고 새로운 환경에서는 새로운 질서와 패턴을 잘 만들어내는 동물이라는 것이다. 하버드대학의 심리학자 마이클 노튼(Michael Norton) 팀의 연구에 의하면 특정 의미를 띄던 일상적 의식을 더 이상 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이를 잘 변형시켜 재창조하는 경향을 보인다. 예컨대 사랑하던 남편을 잃고 후, 함께 TV를 보거나 저녁을 먹으며 대화를 나누는 등 남편에게 사랑을 전할 길이 없어진 아내가 매주 한 번씩 남편이 아끼던 차를 세차하며 남편과 대화하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는 것이 한 예다.
노튼에 의하면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많은 일상이 단절된 대신 가족끼리 하루에 한 번, 몇 시에서 몇 시 사이에 모여서 게임을 하거나 대화를 나누는 등의 새로운 일과를 만들어낸 가족들이 그렇지 않은 가족들에 비해 더 행복도가 높은 것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일상이 없어진 지금이야말로 어쩌면 일상의 소중함을 되새기며 작지만 의미 있는 나만의 시간들을 만들어낼 수 있는 좋은 기회일지도 모른다. 예컨대 하루에 한 시간 나를 채우기 위해 독서를 하거나 조용한 티타임을 갖거나 오늘 하루 무슨 생각을 했는지를 기록하거나 또는 나의 지인처럼 화분을 가꾸거나 손수 집안 인테리어를 시도해보는 창조적인 활동들도 좋다. 나는 튤립을 키우기 시작했는데 튤립 하나가 가져다 주는 기쁨이 생각보다 큼을 느끼고 있다.
이런 작은 일과들이 안정감과 방향성을 가져다줄지는 몰라도 기쁨과는 크게 상관없을 것 같지만 그게 그렇지 않다. 사람들에게 오늘 들었던 음악, 먹었던 음식, 입었던 옷, 친구와 했던 대화 같은 소소한 것들을 넣어 타임머신을 만들게 하고, 시간이 지나 나중에 그 타임머신을 열게 한다. 이런 자잘한 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냐며 시큰둥했던 사람들도 실제로 타임머신을 열었을 때 그날 들었던 음악 같은 작은 정보들에 ‘진짜 자신’을 발견한 것처럼 크게 기뻐했다는 연구 결과가 있었다.
생각해보면 우리의 삶을 만드는 것은 99%가 ‘일상’이다. 특별한 일은 1%도 안 되며 이것들은 기억에도 잘 남는 편이다. 하지만 삶의 99%인 일상은 손에 꼭 거머쥐지 않으면 나도 모르게 기억 속에서 증발해버리고 만다. 우리의 삶을 가득 채우던 작은 일들, 그때 듣던 음악, 먹던 음식, 그때 갔던 카페, 그날 나눴던 대화, 그날의 집안 풍경들이야말로 훗날 가장 그리운 무엇이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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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디셀렉트에서 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읽기
박진영 | 《나를 사랑하지 않는 나에게》, 《나, 지금 이대로 괜찮은 사람》 등 삶에 도움이 되는 심리학 대중서를 집필하였다. 현재는 노스캐롤라이나대학교University of North Carolina at Chapel Hill 의과대학 통합의학 프로그램 소속 연구원으로 일하면서 마음 챙김, 자기 자비 관련 연구를 하고 있다. 심리학의 최신 연구들에서 때로는 위안을 주고, 때로는 마음을 단단하게 바로 세울 이야기들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