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혜 예술사저술가·경성대 외래교수
모네는 1890년대 말 수련을 그리기 시작했다. 지베르니에 정착한 지도 15년이 흘러 있었다. 지베르니는 파리에서 북서쪽으로 80㎞ 정도 떨어진 작은 마을이다. 오늘날 세계적인 명소가 됐지만 1883년 모네가 이사 갔을 때는 한적한 시골이었다. 엡트강(江)이 지베르니를 스쳐 가까운 센강으로 흘러든다. 엡트강가에는 포플러와 버드나무가 늘어서 있고 센강 건너편 언덕에는 작은 마을이 점점이 흩어져 있었다. 모네는 보자마자 이곳이 마음에 들었다.
지베르니로 이사할 때만 해도 모네의 경제 사정은 좋지 않았다. 무리해서 집을 옮긴 후 모네는 자기가 사고 친 게 아닌가 많이 걱정했다. 하지만 행운의 여신은 모네를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 1880년대 말 인상주의에 대한 평가가 호의적으로 돌아서고 그림값이 오르면서 모네는 빈곤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모네의 취미는 정원 가꾸기였다. 가난할 때도 집을 구하면 마당에 화초부터 심었다. 지베르니의 집에는 원래 손바닥만 한 마당이 딸려 있었다. 모네는 주변 땅을 사들였다. 그리고 정원을 넓혀갔다.
1893년 모네는 앱트강물까지 끌어와 연못을 만들 계획도 세웠다. 그러자 동네 사람들이 반대하고 나섰다. 물이란 물레방아를 돌리거나 가축에게 먹이는 것이지 연못에 댄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화가 난 모네는 자기의 계획을 고집했다. 해당 관청은 대가가 된 모네를 무시할 수 없었다. 결국 연못에 물을 대는 것을 허가해줬다. 연못을 만들지 못했다면 '수련'도 없었을 것이다.
모네는 정원에 색깔까지 맞춰 꽃을, 연못에 수련을 심는 데 열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연못을 그리기 시작했다. 1897년 여름에는 '거대한 수련 그림으로 벽 전체를 둘러싼 방'까지 구상했다. 훗날 오랑주리 미술관에서 실현되는 아이디어가 이때 태어난 것이다.
큰 그림을 그리자니 별도의 작업 공간이 필요했다. 모네는 정원 한구석에 있는 오두막을 헐었다. 여기에 천장으로 빛이 들어오는 작업실과 창고, 거실·침실이 갖춰진 별도의 스튜디오를 짓기 시작했다. 스튜디오는 1899년 완성됐다.
클로드 모네 '수련', 모네가 '수련'을 그리기 시작할 때의 작품이다(1897년, 73x100㎝, 마르모탕 모네 미술관, 프랑스 파리).
1900년 예순 살의 모네는 뒤랑뤼엘 화랑에서 첫 '수련' 전시회를 열었다. 12점이 전시됐다. 이듬해에는 연못 확장 공사로 수련을 그리지 못했다. 1903년 연못은 다시 수련으로 가득 찼다. 모네는 그림에 달려들었다. 1909년의 '수련' 전시회는 큰 성공을 거뒀다.
1860년대에 화가의 길로 들어선 모네는 많은 것을 이뤘다. 인상주의는 세계로 퍼져나갔다. 모네는 붓 하나로 명성과 부(富)를 쌓았다. 수련이 활짝 핀 지베르니의 정원은 그 증거였다. 하지만 우울한 말년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1911년 부인 알리스가 세상을 떠났다. 알리스는 모네의 두 번째 부인이었다. 두 사람은 가난한 화가와 부유한 후원자의 부인으로 만나 우여곡절 끝에 가정을 이루고 30년 이상 함께 살았다.
모네는 슬픔에 빠져 한동안 붓을 잡지 못했다. 1914년에는 지병이 있는 맏아들 장까지 세상을 떠났다. 바깥세상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으로 젊은이들이 죽어나가고 있었다. 전쟁은 지베르니의 문턱까지 와 있었다.
모네의 둘째 아들 미셸과 알리스의 아들 장 피에르 오슈데가 입대했다. 지베르니에는 야전병원이 들어섰다. 일흔이 넘은 모네는 시력을 거의 잃은 상태였다. 수십 년 동안 야외의 직사광선 아래서 그림을 그리며 눈을 혹사한 결과였다. 그러나 모네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림을 그리는 일뿐이었다.
1914년 모네는 마지막 작품이라 생각하고 '수련' 연작에 착수했다. 캔버스 수십 개가 쌓여갔다. 1918년 11월11일 휴전이 선포됐다. 다음 날 모네는 조르주 클레망소 총리에게 편지를 썼다. "전쟁 중 죽은 넋을 위로하고 평화 회복을 기념하기 위해" 대형 '수련'을 국가에 기증하겠다는 내용이었다.
클레망소 총리는 젊은 시절부터 모네와 막역한 친구였다. 진보적인 언론인으로 프랑스의 민주화를 위해 애쓰다 1917년 총리 자리에 오른 인물이다.
모네는 연작을 그릴 때 여러 캔버스로 동시에 시작했다. 전체적으로 색조와 분위기를 맞춰가며 완성한 것이다. 모네가 작품과 씨름하는 동안 클레망소 총리는 전시 공간을 물색했다. 애초 개관한 지 얼마 안 된 로댕 미술관이 물망에 올랐다. 그러다 클레망소 총리가 오랑주리를 제안했다. 오랑주리는 튀일리 궁전의 온실이던 곳으로 당시 온갖 용도로 쓰이고 있었다. 클레망소 총리는 틈틈이 지베르니로 찾아가 쇠약해진 모네를 격려했다. 한편 해당 부처와 협의해 오랑주리를 전시 공간으로 바꾸기 시작했다.
오랑주리 '수련' 전시실
모네는 '수련'이 미술관에 걸리는 것도 못 보고 1926년 12월 영면했다. 이듬해 클레망소 총리가 참석한 가운데 오랑주리 미술관이 문을 열었다. 두 타원형 전시실은 8점의 '수련'으로 둘러쳐졌다. 높이 2m, 8점을 모두 연결하면 폭이 91m에 달했다.
제1전시실의 네 패널은 각각 '물에 비친 구름' '아침' '녹색 그림자' '일몰'을 묘사한다. 제2전시실의 네 패널은 물가의 버드나무와 연못이 어우러져 빚어내는 효과를 묘사한다. 커다란 그림 앞에 서면 하늘과 물, 빛 속으로 풍덩 빠져든 느낌을 받게 된다. 모네의 예술 인생을 결산하는 장엄하고 아름다운 작품이다.
'수련'을 인상주의 작품이라고 말하기란 어렵다. 모네는 말년에 풍경을 관찰·재현하는 인상주의 방식에서 점차 멀어져갔다. 그의 관심은 색채 자체와 색의 조화로 옮겨갔다.
'수련'을 연대순으로 늘어놓으면 알 수 있는 것은 후기로 갈수록 표현 대상이 무엇인지는 덜 중요해진다는 점이다. 대신 빛과 대기가 만들어내는 색채의 변화, 분위기는 더 중요해진다. 종국에는 연못임을 나타내는 지시적 요소가 아예 사라지고 빛의 반사, 물의 투명함, 거기에 비친 하늘, 어른거리는 그림자만 남는다. 추상화가 바실리 칸딘스키(1866~1944)가 모네의 후기작에서 영감을 얻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오랑주리 미술관의 북적거리는 현재 모습과 달리 개관 당시에는 관람객이 거의 없었다. 1920년대 말 사람들의 관심은 추상, 큐비즘, 초현실주의 같은 아방가르드 예술에 쏠려 있었다. 인상주의는 한물간 사조로 취급돼 잊혀가고 있었다.
오랑주리가 인기 있는 미술관이 된 것은 20세기 후반 들어서다. 전후 세계 미술관들이 인상주의 기획전을 열고 연구서가 나오고 미술시장에서 인상주의 작품이 최고가를 기록하면서 오랑주리는 관람객으로 붐비게 됐다.
모네가 43년 동안 살았던 지베르니 저택은 둘째 아들 미셸에게 상속됐다. 모네의 의붓딸이자 며느리인 블랑슈 오슈데가 지베르니를 관리했다. 알리스의 딸인 블랑슈는 미술에 재능이 있어 모네에게 사랑받았다. 블랑슈는 성장해 모네의 맏아들 장과 결혼했다. 1914년 장이 죽은 뒤에도 모네 옆에서 지베르니 저택을 관리했다. 1947년 블랑슈가 세상을 떠나자 지베르니 저택에는 잡초만 무성해졌다.
미셸은 1966년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다. 자식이 없던 미셸은 아버지의 작품과 컬렉션, 지베르니 저택을 아카데미데보자르(Academie des Beaux-Arts·프랑스학술원을 구성하는 5개 아카데미 가운데 하나)에 기증한다는 유서까지 써놓은 상태였다.
지베르니, 모네의 집
아카데미는 지베르니 저택을 보수·관리할 자금이 없어 내버려뒀다. 그러던 중 1970년대 말 미국 부호들이 조성한 기금으로 지베르니 저택은 복원에 들어갈 수 있었다. 1980년 일반에 공개된 지베르니 저택은 오늘날 연간 50만명이 찾는 명소가 됐다.
모네가 그린 '수련' 대다수는 현재 파리의 마르모탕모네 미술관에 있다. 모네는 1914년부터 1926년까지 125점의 '수련'을 그렸다. 그 가운데 8점을 국가에 기증해 오랑주리 미술관이 탄생했다. 나머지는 미셸에게 상속됐다.
위에서 말했듯 모네 사망 당시 인상주의는 사람들의 관심에서 밀려나 있었다. 오랑주리 미술관은 관람객이 없어 텅 비었고 미셸은 상속받은 많은 '수련'을 팔 수도 없었다.
미셸에게서 '수련'을 기증받은 아카데미는 전시 공간으로 마르모탕 미술관에 눈을 돌렸다. 그러나 미술관이 너무 좁아 정원을 파 지하에 새 전시실까지 만들었다. 1970년 마르모탕 미술관은 마르모탕모네 미술관으로 이름을 바꿔 재개관했다. 그리고 오늘날 모네를 위한 또 하나의 성지가 됐다.
예술사 저술가·경성대 외래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