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되지 않은 사람들.. 이제 '전설'에서 '역사'로 끌어올리자
[5.18 40주년 특집]기록되지 않은 사람들.. 이제 '전설'에서 '역사'로 끌어올리자 [오마이뉴스 박정훈 기자]
당시 송원여고 교감이었던 송희성(83) 전 오월민주여성회 회장은 헌혈하러 온 시민들을 줄 세우는 등 병원에서 '질서 유지'를 돕고 있었다. 그러다가 내과 과장이었던 의사 김아무개씨와 여성 무리의 가벼운 실랑이를 목격하게 된다. "느그들 피는 필요 없어야." 검사를 받으면서까지 헌혈을 하려 했던 이들은 소위 '황금동 콜박스'라는, 유흥업소가 몰려 있는 거리에서 일하는 여성들이었다. 송 전 회장은 의사에게 절박하게 호소하는 여성들의 차림새를 보고난 뒤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현재 수년간 방치 상태로 있는 옛 적십자병원 앞에서 그는 감회에 젖은 듯 말했다.
황금동 여성들의 전설
황금동은 금남로와 도청 등 공수부대의 사격과 무자비한 폭행이 이뤄진 곳과 매우 인접해 있다. 안전을 위해서는 몸을 사려야만 했다. 그런데 황금동 여성들은 오히려 정반대의 길을 택했다. 지리적 특성을 이용해서 민주화운동에서 가장 적극적인 주체로 싸우기를 마다하지 않은 것이다. '술집 여자'라고 비하 당하고 차별받던 그들은, 민주화운동 과정을 통해서 한 명의 시민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고, 이는 5.18 당시 광주가 해방구이자 평등한 자치 공동체를 구성했음을 입증하는 근거이기도 하다. 그런데 당시 황금동 여성들의 활약상에 대해 정리된 자료는 전무하다. 한국현대사회연구소가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499명의 구술을 담아 1990년에 발간한 <광주5월민중항쟁 사료전집>에서 6명의 증언자들이 황금동 여성들에 대해 짧게 언급하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황금동 여성들이 실제 항쟁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알기가 어렵다. 기록이 없다 광주 시민들 사이에서 구전되어온 황금동 여성들의 존재가 언론을 통해 처음 알려진 것은 2018년 <오마이뉴스> 정미경 시민기자의 '5.18 때 피를 나눈 '황금동 여성들'은 왜 잊혔나'(http://omn.kr/r9k2)를 통해서다. 이 기사는 공식 기록 하나 없이 잊힌 황금동 여성들의 활약상을 당시 광주 시민들의 증언을 기반으로 정리하면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 기사를 바탕으로 당시 항쟁에 참여했던 인물들의 추가 증언을 듣고, <광주5월민중항쟁 사료전집>을 참고해 정리한 황금동 여성들의 활약상은 크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황금동 쪽으로 도망치는 시민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하는 등 도움을 주고 ▲ 금남로 등으로 주먹밥 등 생필품을 보급했으며 ▲ 시신들을 수습해서 염을 했고 ▲ 직접 집회나 대치 현장에서 싸웠다. 먼저 이들은 공수부대에게 쫓기는 시민군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하고 돌봐주는 역할을 도맡아 했다. 송희성 전 회장은 "황금동 콜박스 네거리에서 학생들이 도망다닐 때, 다 감춰주고 그랬어. (밖에서 안 보이게) 셔터를 내려버렸어"라며 당시 황금동 여성들이 많은 이들의 목숨을 살리는 데 기여했다는 사실을 전했다. 시민군을 숨겨주는 것은 결코 우연한 계기로 할 수 없는 일이다. 목숨을 거는 위험하고도 능동적인 행위다. 이들이 겁내지 않고 시민군을 숨겨줬던 이유는 전두환 군부세력과 계엄군에 대한 분노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측된다.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를 쓴 이재의씨는 당시 황금동의 분위기를 이렇게 증언했다.
전설처럼 내려오는 '한복 치마 안에 사람을 감싼 채 탁자 밑에 숨겨 놓고 앉아 능청스럽게 계엄군을 상대했다는 일화'는 그저 '영화 같은 이야기'로만 여겨졌다. 하지만 실제로 이들이 도와주고 살린 시민군의 숫자를 추정해 본다면 민주화운동 속 그들의 역할은 역사적으로 재평가될 가능성이 높다.
상무대에서 사망자의 시신을 지키고 염을 한 이들도 있었다. 작고한 고정희 시인이 <월간중앙> 5월호에 기고한 "광주민중항쟁과 여성의 역할"이라는 글에는 이들의 헌신이 기록돼 있다.
정현애(67) 전 관장과 5.18민주유공자 이영자(78)씨의 증언은 좀 더 구체적이다. 5.18 직후 체포되어 광산경찰서(유치장)에 있던 이들은 '진'과 '인자'(예명)를 만났는데, 이들은 '아방궁'이라는 유흥업소에서 일했고, 자신들이 5.18 당시에 시신 수습을 했다고 밝혔다고 한다. 아방궁에서만 7~8명이 시신을 염습해서 상무대로 옮기는 일을 했다는 것이다(아방궁에 대해서 정현애 전 관장은 황금동 콜박스 거리의 유흥업소, 이영자씨는 도청 뒤 나이트클럽, 송희성 전 회장은 도청 뒤 '요정'이라고 기억한다). "그들도 광주 시민" 황금동 여성들의 활동이 시민군을 돕는 일에만 그쳤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집회에 참여하고, 대치 상황에서 계엄군에게 대항하기도 했다. 짱돌을 던지고, 황금동에서 바리케이드가 쳐지자 빈 맥주병을 나르기도 했다. 총이 없을 뿐, 그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모든 자원을 활용해 싸웠다.
목포 출신 '인자'와 서울 출신 '진'... 구체적이고 중요한 증언들
그런데 앞서 언급한 증언 자료는 황금동 여성들의 활동을 설명하는 데는 불완전하다. 먼저 이들은 일반적인 시민 대학생 조직에 속해 있지 않았다. 이들이 항쟁에 참여한 계기가 무엇인지, 어떻게 조직적으로 움직일 수 있었는지 등은 외부인이 규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들의 활약상 역시 목격자들의 증언만으로는 구체적, 입체적으로 기록하기 어렵다. 황금동 여성들의 직접 증언이 나와야 한다. 그러나 80년 이후 황금동 여성들을 만났거나 연락했다는 사람을 찾지 못했다. 또한 황금동 거리를 둘러봐도 80년대 '황금동 콜박스'라는 유흥의 거리는 아예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다. 지금 황금동은 옷 가게와 음식점이 모여 있는 흔한 도시의 중심부 모습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나마 올해 초, 당시 항쟁에 참여했던 여성 운동가들로부터 황금동 여성들의 신원을 짐작하게 해주는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특히, 계엄군에 의해 체포된 여성들만 모여 있던 광산경찰서에서 진과 인자(예명)이라는 황금동 여성들을 만났다는 정현애 전 관장의 증언은 상당히 구체적이었다.
5.18 당시 계엄군의 만행을 고발하는 '가두방송'을 했다가 체포된 차명숙(59) 대구경북 5·18동지회장은 광산경찰서에 오기 전에 505보안 상무대에서 고문을 당했다. 당시 힘들고 고통스러운 상황이었지만 '황금동 여성들'의 존재를 기억한다고 말했다.
계엄군에 붙잡힌 황금동 여성들에 대한 기록이 서류로 남아 있진 않을까? 5.18 민주화운동기록관에 남아 있는 '훈방' 관련 자료(5.18 광주 민주화운동자료총서)를 살펴봤다. 7월 3일 훈방 명단에 '인자'라는 이름은 있었으나, 정 전 관장이 말하는 이와 동일 인물인지는 알 수 없었다. 직업란을 살펴봐도 황금동 여성들로 특정될 수 있는 인물이 보이지 않았다. 다만 훈방자에게 받는 '각서' 자료가 일부 남아 있었는데, 한 여성의 직업이 접대부(향락)으로 적혀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주소 역시 한 여관으로 적혀 있는 것을 볼 때, 그는 '황금동 여성들' 중 한 명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추적은 딱 여기까지였다. 위 각서에 쓰인 이름과 광산경찰서에서 감옥생활을 했던 두 명의 예명을 바탕으로, 5.18 단체들과 성매매문제해결을위한전국연대 등에 질의했으나 마땅한 단서를 찾을 수 없었다. 실제로 취재 과정에서 만나거나 연락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너무 시간이 오래 지났다" "만나기 어려울 거다"라며 부정적인 전망을 드러냈다.
<오마이뉴스>가 황금동 여성들을 찾습니다 그러나 한 지역을 기반으로 조직적으로 항쟁을 했던 황금동 여성들의 활약을 이대로 야사(野史)로 남겨둘 수만은 없다. 유치장에 있던 황금동 여성들의 말처럼, 그들은 당당하고 옳은 일을 했고, 현재의 한국 사회는 이를 기억해야 한다. 무엇보다 황금동 여성들의 증언이 세상에 알려지면, 80년 5월 광주에서는 계층과 지위를 초월한 항쟁이 벌어졌고, 여성들 또한 항쟁의 주체였다는 사실이 재조명될 수 있다. 이는 5.18의 의미를 더욱 확장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황금동 여성들의 이야기가 더 이상 '전설'로 남지 않기를 바란다. 교과서에서 배우는 '역사'가 되어야 한다. <오마이뉴스>는 한 명 한 명 '광주 시민'으로서 항쟁에 참여했지만, 기록되지 못한 그들을 계속 찾을 것이다. ※ 5.18 민주화운동 40주년, <오마이뉴스>는 5.18 민주화운동의 숨은 주역 중 하나인 '황금동 여성들'을 재조명하고, 기록하고자 합니다. 만약 자신이 '황금동 여성들'로서 민주화운동에 참여했거나, 혹은 황금동 여성들을 알고 계신 분이 있다면 꼭 오마이뉴스에 제보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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