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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아 철학: 당신의 생각이 곧 당신이다

이미행복 2020. 5. 24. 15:42


스토아 철학: 당신의 생각이 곧 당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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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와 영양사들은 종종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먹는 것이 곧 당신이다”. 이는 최고의 조언이다.

우리 몸은 5천만~7천만 개의 세포로 구성되며, 매순간 이 세포들은 교체된다. 우리가 충분한 영양소를 섭취하지 못하면 피부색이 변하고, 잇몸에는 피가 나며, 뼈는 약해지고, 머리카락은 빠질 것이며, 쉽게 피로해지고 병에 걸릴 가능성도 커진다. 쓰레기 같은 음식이 기분을 나쁘게 만드는 것은 물론이다.

이 원칙은 우리의 마음에도 적용된다. 쓰레기 같은 생각은 인성을 나쁘게 만들 수밖에 없다. 마치 음식이 몸에 작용하는 것처럼 우리가 섭취하는 정보가 우리의 사고방식과 생각을 결정하게 된다.

이와 관련된 가장 훌륭한 명언으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한 다음의 말이 있다.

“당신의 생각이 바로 당신 정신의 질을 결정한다. 당신의 영혼은 당신이 하는 생각의 빛깔을 띠게 된다.”

이 명언은 스스로 반성하게 만드는 동시에 인간의 정신이 어떠한 것인지를 말해준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정신은 그저 빈 공간이 아니라 정보로 가득찬 것이며, 마르쿠스는 영혼이라 부른 한 인간의 인성을 만들어내는 역할을 한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로마의 황제였고 스토아 철학자였다. 그의 사후 출판된, 명상록으로 알려진 그의 일기는 황제의 일상이 가져오는 고난에 대항하는 그의 철학적 사고로 가득차 있다.

이성적 지도자

어떤 이들은 저 말에 의문을 가질 것이다. 황제로 사는 것이 뭐가 힘들다는 말일까? 우리는 로마의 황제가 향락에 취해 살았을 것이라 흔히 생각한다.

하지만 마르쿠스의 삶은 이와는 거리가 멀었다. 당시 로마 황제는 일상적으로 전쟁을 수행해야 했다. 게르만 족과 사마르티안 족은 제국의 북쪽을 늘 침범했고 파르티안 인들은 동쪽을 공격했다. 마르쿠스는 집권기간의 상당 부분을 로마가 아닌 최전선에서 자신의 부대를 이끌며 보냈다.

전쟁은 제국에 대한 위협 중 일부에 불과했다. 동쪽에서 돌아온 병사들은 천연두로 추정되는 역병을 가지고 돌아왔으며, 이 질병은 제국을 휩쓸었다. 마르쿠스와 같이 제국을 지배하던 루키우스 베루스가 이 병으로 죽었으며, 이후 마르쿠스의 사망에도 이 병이 원인이 되었으리라 여겨진다.

내전으로까지 번질 수 있었던 음모들이 있었다. 황제 주변에는 야망을 가진 아첨꾼과 교활한 정적들로 가득했고, 황제는 정치적 불안정을 해결하면서 역모에도 주의해야 했다.

때문에 로마 황제의 평균 집권 기간은 매우 짧았다. 다수가 자신의 부하에 의해 살해되었다. 곧, 로마 황제의 삶은 엄청난 압박감과 책임감에 눌린 삶이었다.

마르쿠스는 이런 혼란기의 로마 제국을 다스릴 적절한 황제였다. 위대한 정치철학자인 마키아벨리는 로마를 안정적으로 지배했다고 말한 오현제(다섯 명의 현명한 황제)에 마르쿠스를 포함했다.

마키아벨리는 이들 오현제가 “선한 삶, 바른 정치적 의지, 그리고 의회와의 우호적 관계”를 통해 이를 이루었다고 말했다.

안정적인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안정적인 정신이 필요하다. 마르쿠스는 선대로부터 철학적 전통을 물려받았다. 그의 양할아버지인 황제 하드리아누스는 수사학과 철학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황제로서 향락을 추구할 수 있었지만, 젊은 시절부터 철학자의 단순한 삶을 추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헤진” 옷을 입고 때로 바닥에서 잠들었다.

로마의 귀족들은 스토아 철학을 따랐지만 마르쿠스는 소피스트와 에피쿠르스 학파, 그리고 플라톤 철학과 소크라테스 철학에도 익숙했다. 어떤 황제들은 철학을 금지하고 철학자들을 내쫓았지만, 마르쿠스는 도서관과 철학 학파의 번창을 허락했다.

로마 제국의 지도자들은 종종 평화로운 시기에 탐욕과 교만에 빠졌다. 우리는 탐욕적인 네로 황제를 불행한 지도자로, 마르쿠스를 위대한 지도자로 생각한다. 마르쿠스가 모범적인 통치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 중에는 선한 사고를 위한 그의 노력이 있다.

심사숙고

그렇다면 무엇이 “선한” 생각일까? 우리는 우리가 하는 생각의 가치를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스토아 철학자로서 마르쿠스는 이성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겼다. 고대 사회에서 철학은 오늘날처럼 특별한 과목이 아니었다. 철학은 곧 지식과 지혜에 대한 열정을 의미했다. 우리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고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 주는 것은 바로 자기 반성과 심사숙고이다. 철학을 통해 우리는 더 나은 시민, 친구, 형제, 부모, 연인이 될 수 있다.

고대의 학파, 특히 스토아 철학은 바로 이 점을 목표로 삼았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건강한 인간은 스스로 이성적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이성을 훈련함으로써 자신의 “오이케이오시스”, 곧 “지향” 혹은 “소속감”으로 번역되는 이 감각을 채울 수 있다. 이성을 사용함으로써, 우리는 왜 더 나은 삶을 위해 서로 협력해야 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마르쿠스는 이렇게 썼다. “이성적 존재의 선이란 바로 공동체이다. 우리가 공동체를 위해 태어났음은 아주 오래 전부터 알려진 사실이다.”

스토아 철학자의 삶이란 자연과 함께 어울리되 이성을 최우선으로 두는 것이다. 이는 스토아 학파의 전통은 우주가 이성의 법칙에 의해 지배되기 때문이며, 인간은 이성적으로 행동하려는 본능이 있기 때문이다. 우주가 이성적이며, 인간이 이성적 본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바로 우주의 질서를 나타낸다.

마르쿠스는 이렇게 썼다.

“세상에서 가장 강하고 탁월한 존재를 존중하라. 그 존재는 바로 만물을 활용하고 이를 지배하는 존재다. 마찬가지로, 네 자신 안에서 가장 강하고 탁월한 존재를 존중하라. 그 부분은 세상에서 가장 강하고 탁월한 존재와 같은 일을 너에게 한다. 그 부분은 네 안의 모든 것을 활용해 너의 삶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스토아 학파에게 이성적 사고 – 공동체와 공적 의무가 가진 가치와 덕에 헌신하는 것 – 는 바로 선한 일이며 우주를 지배하는 이성 혹은 “로고스”의 질서를 반영하는 일이었다.

스토아 학파에게는 감정이 바로 그 기준이 되었다. 우리가 이성에서 벗어날수록 우리는 잘못된 판단을 내리게 된다. 예를 들어 탐욕은 돈과 소유물이 가진 고유한 가치에 대한 잘못된 판단이다. 분노와 질투는 인간관계에 대한 잘못된 판단이다.

우리가 진정 필요로 하지 않는 것에 대해 가지는 욕망은 우리가 거의 통제할 수 없는 잘못된 판단이다.

명확하게 사고하기 위한 훈련

오늘날의 세상은 명확한 사고를 거의 불가능하게 만든다. 도시에 거주하는 우리는 거의 매일 우리의 가치판단을 왜곡하는 정보들에 둘러싸여 있다.

마케팅의 목적은 사람들이 비이성적 사고를 하게 만드는 것이다. 광고는 우리가 진정으로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을 사고 싶도록 하기 위해 성적 매력이나 인기인에 대한 욕망을 이용한다. 이런 광고를 실은 미디어는 부유하고 인기있는 이들의 이야기를 방송하며, 사람들은 이를 보고 자신이 가진 것에 대해 만족하거나 자신이 부족한 것에 대해 분노한다.

텔레비전, 잡지, 신문은 우리의 본능을 자극하는 무의미한 이야기들로 가득차 있다. 전통적인 매체들 또한 세계화된 정보 경제 체계 안에서 독자의 시선을 끌기위한 선정적인 기사들로 지면을 채우고 있다. 이들은 진정 의미있는 우리의 삶과는 무관한 정보를 우리로 하여금 소비하게 만들고 있다.

스타티스타(Statista)의 추정에 따르면 미국인들은 하루 평균 3.35시간을 텔레비전에 소비한다. 이는 다른 스크린 외에 텔레비전에만 일주일 중 거의 하루를 보낸다는 뜻이다.

물론 어떤 프로그램은 유익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프로그램이 그렇지 않다. 몇 시간이고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볼 때 우리의 감각은 우리가 분명 원치 않을 본능을 자극하도록 만들어진 자극적인 뉴스, 무의미한 예능과 광고들에 의해 거의 마비된다.

이는 그저 소중한 나의 시간이 사라지는 것을 넘어,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게 만드는 능력 자체를 없앤다. 이런 유혹이 가득한 세상에서 건강한 정신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강한 다짐이 필요하다. 그루초 막스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텔레비전은 매우 교육적입니다. 누군가 텔레비전을 켤 때마다, 나는 다른 방으로 가서 책을 읽기 시작하지요.”

모든 사람이 스토아 철학의 다소 종교에 가까운 믿음을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하지만 우리의 생각은 우리 스스로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시기심, 공포, 부끄러움, 탐욕은 우리의 판단을 흐리게 만들고 삶을 더 어렵게 만들 뿐이다.

이제 텔레비전이 생각날 때마다 그루초 막스의 말을 기억하며 책을 집어들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과 같은 책은 당신의 정신을 강인하게 만들고 인성을 길러줄 것이다.

삶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무분별한 결정이 아니라 이성을 통한 깊은 생각이 필요하다. 이성을 활용하는 것은 마치 근육처럼 훈련이 필요하며, 이를 통해 우리는 탁월함과 행복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미디엄, Steven Gambardel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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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생각이 틀릴 수도 있음을 알려주는 10가지 통념
통념을 통렬하게 깨부수는 10가지 반례(反例)


통념은 일반인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틀에 박힌 관념이다. 통념은 어느새 개인은 물론 개인이 몸담고 있는 공동체의 생각을 지배하기 시작한다. 통념이 굳어지면 고정관념이 생긴다. 고정관념은 타성을 먹고 자란다. 타성을 먹고사는 고정관념은 웬만한 노력으로는 개선되지 않는 고장 관념으로 전락한다. 관념이 고정되는 수준을 넘어서 고장 난 것이다. 생각의 대수술이 필요할 정도로 틀에 박힌 생각의 장도와 수준이 심각해진다.



①생각과 쓰기의 준비:
생각이 있어야 뭔가를 쓰는 게 아니라 
일단 쓰기 시작하면 새로운 생각도 떠오른다.


어떤 글을 쓸지에 대한 어느 정도 생각이 있어야 글을 쓸 수 있다. 아무 생각이 없으면 글은 한 줄도 쓸 수 없다. 하지만 너무 생각만 거듭하다 생각은 생각의 꼬리를 물고 글로 옮겨지지 않는다. 생각을 거듭할수록 생각은 또 다른 생각의 꼬리를 물고 생각을 반복한다. 생각의 끝은 생각을 멈출 때 일어난다. 어떤 글을 쓸 것인지 글을 잘 쓰려면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 남들이 봐도 창피한 정도의 글을 쓰지 않으려면 잘 써야 된다는 생각이 글쓰기를 한 발작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만든다. 아무것도 쓰지 않고 하얀 백지 위를 쳐다보면 생각만 하면 머리도 하야 진다. 논리에 안 맞고 어설픈 생각이라고 일단 쓰기 시작한 결과를 고치면 된다. 생각은 가만히 앉아서 생기기보다 뭔가를 모색하고 실험하면서 낯선 상황에 마주칠 때 생기는 경우가 많다. 생각지도 못한 일을 당해보면 생각지도 못한 생각이 생긴다. 글을 잘 쓰기 위한 생각보다 글을 잘 쓰면서 생기는 생각이 글쓰기에 도움이 된다. 작가가 쓰는 글은 생각해서 쓰기보다 쓰면서 생각할 때 글쓰기를 위한 색다른 생각이 잉태된다. 생각은 머리로 고민한 산물이 아니라 몸으로 체험한 결과, 이전과 다른 생각이 생긴다.


②배움과 행동의 순서:
배워야만 행동할 수 있는 게 아니라
행동하면서 배우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명언이다. 뭔가를 잘하기 위해서는 해당 분야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스킬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 분야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배우는 활동을 한다. 배우면 전문성이 생겨서 과감한 실천으로 옮길 것이라는 가정을 갖고 있다. 하지만 사람은 안다고 아는 것대로 실천하지 않는다. 지행일치(知行一致)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모순이다. 먼저 알아야 행동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사람은 몰라도 실천하는 가운데 배운다. 오히려 앎이 삶과 독립적으로 선행되어서 생기는 게 아니라 삶이 곧 앎이고 앎이 곧 삶일 때 지행은 일치의 문제가 아니라 합일(合一)의 문제다. 실천하면서 배운 전문성은 내 몸이 움직여 몸소 깨달은 체험적 지혜라서 더욱 확신이 가고 강력한 신념이 생긴다. 삶 속에서 앎이 숙성될 때 앎은 삶과 구분되지 않는다. 그런 앎이라야 삶을 변환시킬 수 있는 강력한 지적 자극제가 될 수 있다. 자기가 몸으로 체득한 지혜는 그만큼 믿음이 간다. 자신이 실천을 통해 옳다고 믿는 신념체계를 기반으로 생긴 배움은 더욱 강력한 호소력을 지닌다. 모든 앎은 그 앎이 생긴 삶과 무관하게 생기지 않는다. 삶으로 숙성된 앎은 그 자체가 삶이며 삶은 곧 앎의 무대가 된다.



③바쁜 일상과 독서부진의 원인:
바빠서 책을 못 읽는 게 아니라
안 읽어서 바쁜 것이다.


한국 성인 10명 중에 4명은 일 년에 책을 한 권도 안 읽는다고 한다. 정보통신 기술의 강국일지는 몰라도 사고 혁명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독서는 최빈국(最貧國) 중에 하나다. 책을 읽지 않는 이유는 일상이 바쁘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책을 읽을 시간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 과연 그럴까? 책을 읽을 시간이 없는 게 아니라 책 읽을 시간이 많아도 책을 읽지 않으려고 노력한 습관 때문에 책을 읽지 않는 것이다. 책을 읽지 않는 것은 책을 읽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그것을 의도적으로 노력해서 실천한 결과다. 결국 책을 읽지 않는 것은 시간이 부족해서 못 읽는 나태함의 결과가 아니라 시간이 나도 다른 일을 열심히 한 다음 남은 시간을 내서 책을 읽으려고 했지만 결국 시간이 나지 않거나 시간이 나더라도 책을 읽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해온 근면의 성과다. 모두가 바쁘지만 바쁜 시간에도 책을 읽는 사람은 시간이 남아돌아서 책을 읽는 게 아니라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을 내서 책을 읽는 것이다. 바빠서 책을 못 읽는다는 말은 핑계에 불과하다. 그럼 안 바쁘면 책을 읽을까? 바쁘지 않으면 그 시간에도 책을 읽지 않고 다른 일로 소일할 것이다.


④마음과 몸의 관계:
마음이 몸을 지배하는 게 아니라
몸이 마음을 지배한다.


흔히 사람들은 마음(mind)이 몸(body)을 지배한다고 생각한다. 마음만 먹으면 몸도 맘대로 지배하고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몸이 말을 듣지 않는 이유는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을 때 발생한다. 마음이 몸을 통제하고 조정할 수 있을 때는 몸에 아무런 문제가 없을 때, 즉 몸이 건강할 때 마음의 지배를 받을 수 있다. 하지만 몸이 극한의 한계상황이나 위기가 닥쳤을 때 마음이 아무리 몸을 통제하고 지배하려고 해도 몸은 말을 듣지 않는다. 아니 마음이 시키는 대로 몸을 움직일 수 없기 때문에 마음이 아무리 명령을 내려도 그대로 실천하지 않는 것이다. 몸이 한계나 위기 상황과 맞닥뜨리거나 더 이상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위험한 상황에 빠졌을 때는 몸은 마음이 뭐라고 해고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몸이 건강해야 마음도 건강해진다. 마음은 몸이라는 집에서 살아간다. 집이 무너지면 마음이 거주할 집도 같이 없어진다. 마음은 통제할 수 없는 난국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⑤완벽한 계획과 시작하지 못하는 이유:
완벽한 계획이 없어서 시작을 못하는 게 아니라
완벽하게 계획을 수립하다가 시작을 못하는 것이다.


“위대함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지금 서 있는 자리에서 시작하고, 지금 가지고 있는 것만 가지고 시작하고, 지금 할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하라.” 미국의 프로 테니스 선수, 아서 애쉬(Arthur Ashe)의 말이다. 시작하지 못하는 이유는 시작하지 않기 때문이다. 시작하지 않으면 시작할 수 없다. 시작하는 방법을 너무 오랫동안 연구한 나머지 시작하는 방법을 완벽하게 알아도 막상 시작하지 않으면 시작할 수 없다. 어떻게 시작하면 완벽하게 시작할 수 있을지를 완벽하게 계획을 수립하다 완벽하게 시작하지 못하는 이유는 시작하지 않고 시작하는 방법이나 계획만 세우기 때문이다. 계획 없이도 시작할 수 있다. 너무 완벽한 계획을 세우다 세운 계획대로 실제 현실은 움직이지 않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때로는 그냥 시작하고 행동하면서 다음 단계로 어떻게 진입할 것인지를 계획을 세워보고 그대로 실천하는 가운데 세웠던 계획도 다시 수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반복해서 발생한다. 완벽한 계획 이후에 이루어지는 완벽한 시작은 두 가지 독립적인 별개의 활동이 아니라 두 가지가 동시에 이루어지면서 계획을 수정하고 행동하면서 계획을 수정하는 통합적인 활동이라고 생각할 필요가 있다.


⑥피하기와 즐기기의 상관관계:
피할 수 없으면 즐기는 게 아니라
즐기면 피할 수 있다.



기성세대는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을 듣고 참고 견디면서 일해 왔다. 그런데 요즘 세대는 “피할 수 없어도 피하라”라고 주장한다. 피할 수 없는 일을 즐기다 오히려 내 몸만 망가질 수 있다는 의미다. 요즘 세대들은 피할 수 없는 일을 붙잡고 억지로 일하지 말고 피할 수 있는 일은 빨리 피하고 좋아하는 일을 잡아서 재미있게 일하라는 철학을 갖고 있다. “피할 수 없어도 피해야 된다”는 말은 하기 싫은 일을 재미없이 계속하다가 재미는 물론 의미 없는 인생을 살 수 있다는 경각심이 들어서 하는 말이다. 피할 수 없는 일을 즐기기는 쉽지 않다. 우선 마음으로 끌리지 않는다. 재미가 없으니 몰입이 안 되고 몰입을 안 하니 의미 있는 성과가 나오지 않는다. 뭔가를 성취하면 행복하고 의미 있는 게 아니라 일을 하면서 행복하다고 느끼는 재미가 있어야 의미 있는 성취가 나온다. 성공하면 행복한 게 아니라 행복하면 성공할 수 있고 뭔가를 성취하면 재미있는 게 아니라 재미있게 하다 보면 의미 있는 성취를 이루는 것이다. 성공과 행복, 재미와 의미도 인과관계를 바꾸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성공을 추구하다 행복을 잃어버리고 의미를 추구하다 재미가 실종될 수 있다. 피할 수 없는 일을 붙잡고 회피하지 않고 계속하다 해피하지 않는 삶을 반복해서 살아갈 수 있다.


⑦방법과 실행의 문제:
방법이 있어야 실행하는 게 아니라
실행을 하다 보면 방법이 생긴다.


뭔가를 시작하기 전에 그 일을 추진하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사실 방법은 실행 속에 스며들어 있다. 방법을 알아야 실행하는 게 아니라 실행하다 보면 그 속에서 어떻게 실행하는지를 알 수 있게 된다. 시행착오가 겪어보고 실패 체험도 해보는 가운데 이전보다 더 잘하는 방법을 체험적으로 알게 된다. 설혹 어떤 방법을 알고 있어도 그 방법대로 한다고 원하는 결과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시작은 미약하였지만 이런저런 시도를 하다 보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색다른 방법도 떠오른다. 방법은 시작하기 전에 완벽하게 구상하는 게 아니라 일단 시작하고 모색하며 실험하다 보면 생각지도 못했던 생각지도도 생긴다. 생각만 해본 사람은 당해본 사람을 못 당한다. 자꾸 해보고 시행착오도 겪어봐야 판단 착오를 줄일 수 있는 색다른 방법도 부각된다. 그러니 방법은 실행 이전에 구상하는 게 아니라 실행하는 가운데 색다른 방법이 부각되는 것이다. 그 방법을 떠오르게 만드는 주체는 악조건 속에서도 실행을 거듭하면서 다양한 체험적 노하우를 축적하는 사람이다. ‘어떻게든’은 눈물겨운 것이다. 방법은 실행 속에 있다(197쪽). “
- 이영광, ‘나는 지구에 돈 벌러 오지 않았다’ 중에서 -



⑧‘힘든 일’과 ‘힘’의 생성:
힘이 생겨야 힘든 일을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힘든 일을 해봐야 없었던 힘도 생긴다.


힘을 기르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힘든 일을 극복하는 과정에 나를 던져보는 것이다. 힘든 상황에서 힘을 쓰다 보면 없었던 힘도 생긴다. 운동도 내가 견딜 수 있는 무게보다 조금 더 무겁고 힘든 무게를 들고 반복해야 힘이 생긴다. 힘든 일에 직면하면 없었던 힘을 쓰기 시작한다. 힘들면 힘이 들어간다. 그러는 사이에 생각지도 못한 힘이 생겨서 다른 어려운 일이 생겨도 버티고 견뎌낼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이다. 힘을 기르고 나서 힘든 일을 하기보다는 힘든 일을 하는 가운데 힘이 생겨서 힘든 일을 극복하는 것이다. 극한의 상황에 도전하는 힘든 일을 해보면 힘든 상황을 견딜 수 있는 힘을 찾아서 쓰기 시작한다. 인생을 살면서 우여곡절과 파란만장, 절치부심과 시행착오를 경험하며 힘든 일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힘이 생긴다. 힘든 상황을 극복하면서 생긴 힘은 더 힘든 상황을 견딜 수 있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힘든 상황을 견디면서 생긴 힘은 더 힘든 상황을 견딜 수 있는 원동력으로 작용하면서 힘의 선순환이 시작되는 것이다. 힘들어야 힘이 들어가고 그때 없었던 힘이 생기면서 힘든 상황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⑨“절대로 포기하지 마라”와 “절대로 포기하지 마라를 절대로 쓰지 마라”:
“절대로 포기하지 마라”는 말 대신에
“절대로 포기하지 말라는 말을 절대로 쓰지 마라.”


우리는 “절대로 포기하지 마라”는 말을 절대적으로 신봉하고 있다. 하지만 과연 모든 상황에서 “절대로 포기하지 마라”는 말을 절대적인 진리로 받아들여야 할까.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인데 잘할 수 없는 일을 붙잡고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계속 가는 사람이다. 어떤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중간에 포기하는 것은 미덕이 아니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하지만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계속 가다가 진짜 죽을 수 있는 체험을 해본 적이 있다. 6박 7일 동안 250Km를 달리는 사하라 사막 마라톤에 도전했을 때다. 하루에 40Km를 달리면서 매일 거리를 늘려가는 사막 마라톤이다. 3일째 되는 날 120Km 지점에서 모래 언덕을 올라가다가 탈진 상태가 겹쳐 아찔한 위기와 한계를 경험한 적이 있다. 이대로 계속 결승선을 향해 달리다가 죽을 수도 있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잠시 고민했다. 레이스 도중에 포기한다는 것이 나 자신에게도 용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잠시 고민하다 레이스를 포기하고 돌아오면서 남긴 세계적인 명언이 바로 “절대로 포기하지 말라는 말을 절대로 쓰지 마라 “였다. 한계는 책상에서 머리로 알 수 없다. 몸으로 한계 상황에 도전해보면 한계를 알 수 있다.



⑩앎으로 삶을 재단하는 공부와 삶으로 앎을 만들어가는 공부:
공부는 책상에서 머리로 배운 앎으로 삶을 평가하는 게 아니라
일상에서 몸으로 체험하는 삶으로 앎을 평가하는 과정이다


공부는 책상에서 하는 ‘정신노동’이 아니라 일상에서 몸으로 하는 ‘육체노동’이다. 진짜 공부는 책상에서 배운 앎으로 삶을 평가하는 게 아니라 삶에서 건져 올린 체험적 깨달음으로 앎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이다. 몸으로 공부하는 사람은 현실 변화에 도움이 되지 않는 관념적인 공부를 증오한다. 지리학자가 지리를 공부하려면 지리를 몸으로 배워야 한다. 즉 책상에서 지리학을 머리로 공부하는 게 아니라 몸으로 지리를 밟고 체험하면서 지리학을 정립해야 한다. 집을 그리라고 하면 지붕부터 그리지만 건설 현장에서는 절대로 집을 지붕부터 그리지 않는다. 일하는 사람의 평범한 논리는 현장 논리대로 배움을 만들어나간다. 책상 지식으로 현실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을 전개하기보다 현장에서 온몸으로 배춘 체험적 깨달음으로 앎을 만들어나간다. 진짜 앎의 근원지는 삶이다. 삶이 앎을 만들어내는 운동장이자 놀이터다. 삶과 무관한 도는 삶과 분리·독립된 실험실이나 창백한 교실에서 차가운 논리로 재단하는 앎은 현실 변화에 무력한 창백한 관념적 앎이다. 앎이 삶을 바꿀 수 없을 때 그 존재 이유는 어디서 찾을 것인가. 경영을 책상에서 배운 경영학자보다 경영의 전반을 몸으로 배운 구멍가게 아주머니가 삶을 바꾸는 경영학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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