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런두런 시끌벅적… 그림 속에 이야기가 넘쳐난다
한국적 문자 추상 선구… 노담 김영주
김영주의 문자추상은 느슨하게 원고지처럼 구획한 화면에 정형화되지 않은 기호를 조합해 리듬감을 자아낸다. 캔버스 왼쪽의 선으로 그린 얼굴과 손바닥, 하트, 삼각형, 다이아몬드 등과 ‘그날이 오면’ ‘MYTH’ ‘사랑’ 등의 단어가 ‘그림시’처럼 읽힌다. 이 작품을 그릴 무렵 그는 “마음대로 색감을 칠한 평면에 하트나 글씨, 기호를 조화시켜 나의 역사의식을 조형화했다. 내 작업은 색채와 형상이 부딪쳐 일어나는 표현력”이라고 했다. ‘신화시대’ 1993년, 가로 5m, 세로 2m. 동숭갤러리 제공 딥 컷(Deep Cut). 대중음악에서 쓰이는 이 말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마니아들이 인정하는 명곡, ‘숨은 보석’을 가리킨다. 한국 미술에도 세계에 당당히 내놓을 만한 ‘딥 컷’이 있다. 다만 장식적 취향이나 접근성의 한계로 제대로 주목받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한국 미술의 ‘숨은 보석’을 지면에는 시원하게, 동아닷컴에는 심층적으로 소개한다. 추상(抽象)은 이야기가 없는 그림일까. 노담(老潭) 김영주(1920∼1995)는 “형상성 있는 추상을 추구했다”고 말했다. 그의 추상에는 시끌벅적 이야기가 넘친다. 화려한 색과 리드미컬한 선, 하트, 손바닥 같은 기호와 한글로 적은 글귀까지.
인체를 단순화해 추상처럼 표현한 초기 작품 ‘예술가의 가족’(1959년). 1950년대 이후 국제 미술계는 추상미술의 바람이 거셌다. 미국에서는 잭슨 폴록, 마크 로스코 등의 추상표현주의가, 유럽에서는 장 뒤뷔페 등의 앵포르멜 회화가 주목받았다. 일본 도쿄 다이헤이요(太平洋)미술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한 김영주는 이 흐름을 재빨리 포착했고 글을 통해 추상미술의 중요성을 알렸다. 그러면서 추상미술을 탐구했다.
사화면을 구획하는 과정을 볼 수 있는 한지 위 먹 드로잉 ‘인간들의 계절’(1960년). 피터르 몬드리안이 풍경을 극단적으로 단순화해 기하학적 추상을 그린 것처럼 김영주는 자신의 의식을 기호로 바꿔 캔버스에 새겨 넣었다. 구체적 표현을 생략하고 작가 고유의 상징을 만들어 내는 것이 추상미술의 방법론이라고 본 그는 이를 문자와 결합했다. ‘그림’에서 문자가 된 한자, 그리고 한글을 다시 그림으로 풀어 놓은 것이다.
문자와 기하학적 패턴으로 화면을 변주한 1987년 작품 ‘신화시대’, 캔버스에 유채, 72.5×60.5cm. 그의 1991년 작인 ‘신화시대’의 신화시대란 작가가 추구하고자 했던 본질적인 세상을 말한다. 그 세상은 시공을 초월한 기호와 문자로 가득하다. 요즘 길거리에서 볼 수 있는 그라피티를 연상케 한다. 이응노(1904∼1989)와 남관(1911∼1990)과 달리 한글을 적극적으로 사용한 것도 특징이다.
선과 도형만으로 구성한 추상 작품 ‘환영’ (1964년), 캔버스에 유채, 129×160cm 1960년대 말 평론을 멈췄던 그가 ‘신화시대’를 발표하자 ‘서양 작가의 누구 것도 닮지 않은, 그러면서 현대적인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1993년 미국 뉴욕 한 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나라 현대미술의 모습을 미국에 정면으로 보여주고 싶다.”
::노담(老潭) 김영주(1920∼1995):: ▽1920년 함경남도 원산 출생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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