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 앙투아네트'와 마카롱
영화 ‘마리 앙투아네트’(2006)는 그녀를 비운의 왕비라기보다 당대 최고 패셔니스타로 해석한다. 그녀는 왕세자빈으로 파리에 온 뒤 발 마사지를 받는 등 향락에 빠진다(①). 영화를 지배하는 화려한 색감은 마카롱(③번 사진 왼쪽 노란 과자)을 비롯한 파티 음식들(②·③)로 대표된다. 황제이던 루이 16세마저도 어수룩하고 착하게 묘사될 뿐이다(④). 마리 앙투아네트는 비극적 최후를 맞지만, 영화 속 왕비는 성문 밖으로 쫓겨나는 결말로 마무리된다.
/영화 캡처
"인간은 불행에 처해서야 비로소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게 됩니다."
마리 앙투아네트를 이야기하려면 그가 쓴 말년의 편지 구절을 인용하지 않을 수 없다. 불과 열다섯 살 나이에 정략결혼을 위해 오스트리아에서 프랑스로 보내졌다. 남편 루이 16세의 성(性)적 문제 탓에 7년 반이나 임신을 못해 압박에 시달렸던 데다가, 인고 끝에 낳은 자식이 죽는 모습도
지켜봐야 했다. 결국 프랑스 혁명 속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고, 역사에는 사치의 상징으로 영원히 이름을 남겼다.
파란만장했다는 단어가 그럭저럭 어울리는 삶이건만 영화는 그런 면을 보여주는 데 크게 집착하지 않는다. 복식을 비롯해 공간과 각종 장식에 이르기까지. 영화 '마리 앙투아네트'(2006)는 과도함의 구현에 초점을 맞춘 영화다. 조금 적나라하게 말하면 보는 즐거움 말고는 남는 게 없을 지경인 가운데, 음식이 그 방점을 찍는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했으니 아무리 공간이 아름답고 즐길 여흥 거리가 넘치더라도 음식이 별로라면
즐거움이 싹 가시는 것도 사실이다. 게다가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고 했으니 입 이전에 눈으로 맛이 좋아야, 비단 '마리 앙투아네트' 같은 경우가 아니더라도 영화 속의 음식으로 모자람이 없다. 영화 속 음식은 수(數)와 양(量), 양쪽 면에서 압도하는 데다가 전부 설명 없이 휙 지나가니 하나씩 식별하기가 어렵다. 그 가운데에서도 눈에 확 들어오는 음식이 있다. 바로 마카롱이다.
초코파이와 흡사하게 둥글넓적한 모양의 살짝 봉긋한 과자 껍데기 두 장, 그 사이 크림 같은 소가 있다. 마카롱의 역사는 실제로 8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그래서 영화 속의 존재감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과자다. 약 십 년 전부터 국내에 들어오기 시작해 이제는 프랜차이즈 카페에서도 살 수 있는 대중 디저트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의외로 만들기는 꽤 어렵다. '앙꼬 없는 찐빵'이라는 표현처럼 크림이나 잼으로 만든 소가 더 중요할 것 같지만, 껍데기가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유가 뭘까? 마카롱의 껍데기는 계란 흰자를 부풀려 올린 '머랭(meringue)'을 바탕으로 만들어진다. 계란 흰자를 거품기로 강하게 오래 휘저으면, 힘으로 단백질의 구조가 바뀌어 면도 거품과 흡사한
부피와 질감을 가지게 된다. 부풀어 오른 만큼 공기를 머금고 있으니, 설탕과 아몬드 가루 등을 더해 반죽을 만들기 쉽다. 균일한 모양과 크기로 짜낸 다음 겉이 살짝 굳을 때까지 실온에서 말렸다가 오븐에서 굽는다. 이와 동시에 소와 비슷한 색의 색소나 음식 재료를 반죽에 더해 입과 눈의 맛을 최대한 일치시킨다.
예를 들어 소에 산딸기 잼을 썼다면 껍데기의 반죽에도 비슷한 빨간색 계열의 색소를, 초콜릿이라면 코코아 가루를 더해 진한 갈색을 내는 식이다. 듣기에는 쉽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웬만큼 숙련되지 않고서는
반죽을 균일하게 짜내기부터가 어렵다. 습도에 약한 머랭의 특성도 고려해야 한다. 원래 머랭을 구우면 바삭바삭해야 하는데, 습도가 높은 환경에서 만들면 수분이 제대로 빠지지 않아 끈적거리고 치아에 달라붙는다.
분위기 통일을 위해서라도 음식이 중요한 역할을 맡는지라, '마리 앙투아네트'에서는 전문 브랜드가 마카롱을 비롯한 디저트류의 제작을 맡았다. '피에르 에르메'와 더불어 프랑스의 양대 마카롱이라고 일컫는 '라뒤레'다. 우열을 가리기 어려운 두 브랜드지만 개성은 분명하게 갈린다. '피에르 에르메'가 현대적인 맛의 조합과
그에 맞는 배색 등을 내세운다면 1862년 문을 연 '라뒤레'는 실제로도 '마리 앙투아네트' 같은 영화에 이질감 없이 어우러질 수 있을 만큼 고전적이다. 5년 전만 해도 두 브랜드 모두 한국에 진출해 '라뒤레'와 '피에르 에르메'를 직접 비교하며 맛볼 수 있었지만 2016년, 2017년에 각각 철수하면서 호시절도 막을 내렸다.
마카롱이라고 오해받는 과자 ‘마카룬’의 모습. /인터넷 캡처
그사이 한국에서는 세계의 흐름과 전혀 다르게 진화한 '뚱카롱'이 완전한 대세로 자리 잡았다. 접두어로 짐작할 수 있듯 보통의 마카롱보다 덩치가 크다. 껍데기는 크게 바뀌지 않았다. 다만 소를 기존의 마카롱보다 기본 세 배, 많게는 다섯 배 이상으로 늘렸다. 소가 음식의 균형이 깨질 정도로 늘어나서 딱 보기에도 풍성함을 바로 느낄 수 있는, '가성비'를 최고의 미덕으로 꼽는
사회가 낳은 디저트다. 굳이 영화와 연관 지어 생각하자면 뚱카롱이 혁명으로 마카롱 왕족을 몰아낸 형국이랄까. 다른 음식과 마찬가지로 '색소 쓰지 않기'를 미덕처럼 내놓고 있으니 색깔도 칙칙해 마카롱의 그 맛은 아무래도 나지 않는다.
뚱카롱의 현실처럼 영화 속 세계도 종래에는 칙칙함으로 뒤덮인다. 영화는 마리 앙투아네트가 마차를 타고 베르사유 궁을 떠나는 장면에서 막을 내리지만, 우리 모두 그 뒷이야기를 알고 있다. 1789년의 프랑스 혁명 이후 루이 16세를 비롯한 왕가는 튈르리 궁에서 연금 상태로 지냈고, 탈출 시도가 무산된
이후로는 탕플 감옥에 투옥되었다. 마리 앙투아네트도 온갖 화려한 복식과 영영 멀어져 칙칙한 색깔의 옷 몇 벌로 버텼다. 마카롱 등 형형색색의 음식은 꿈도 꿀 수 없었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왕정이 폐지되고 나서 루이 16세는 1793년 1월 21일에, 마리 앙투아네트는 1793년 10월 16일 오후 12시 15분에 각각 처형당했다. 집행자의 발을 밟고는 남긴 한마디. "실례했습니다.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었어요."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마지막으로 사족 하나 더. 마카롱과 헷갈리는 '마카룬'이라는 과자가 있다.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
찍으면 '남'이 되듯 마카롱(Macaron)에 '오(o)' 하나만 더하면 완전히 다른 과자가 된다. 이탈리아가 고향인 마카룬은 '곤죽'을 의미하는 마카로네(혹은 마케로네)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아몬드 가루와 코코넛 과육 등을 계란에 버무린 반죽을 구워 만들며, 어떻게 모양을 잡아도 상관없지만 흔히 밤빵이라고 불리는 '상투과자'나 피라미드가 대표적이다. 한편에서는 프랑스의 마카롱을 '이탈리안 마카룬'이라 일컫기도 하지만 그러면 되레 헛갈리니 차라리 각각의 이름을 따로 불러주는 게 훨씬 낫다.